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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라는 묘한 인연 [108]

남편과 이십 년을 함께 살았다. 어제 아침부터 미친 듯 남편에게 쏘아대고 잔잔한 일상에 균열이 가는 듯해 내내 불안하다가 오늘 오후 퇴근이 늦을 것이라는 남편의 전화 목소리를 듣고서야 겨우 안심이 되었다. 남편도 나도 변변한 애인 하나 사귀어보지 못하고 늦은 나이에 양가 친척의 중매로 만나 번개불에 콩 볶아먹듯 급하게 결혼했지만 결혼을 위한 결혼은 아니었다. 우리 둘은 서로 사랑했고 그때 서로의 존재가 절실히 필요했다.

이십 년을 같이 살면서 왜 남들처럼 우리에게도 우여곡절이 없었겠는가?
시집살이 모질게 당한 며느리가 못된 시어머니 된다고 우리 시어머니 여자에게 특히나 가혹했던 시대에 혹독한 며느리 시절 거치면서 지능적으로 며느리를 갈구는 시어머니로 단련된 터라 집요하고 고집스럽게, 참 남의 말 안 들으면서 나를 괴롭히고 갈구었다. 나는 원래 세상의 모든 시어머니에게 며느리는 그 정도 대접은 받는 줄 알았지만 그런 학대를 견뎌내느라 이가 빠지고 몸 여기저기 건강을 잃었다.

남편은 그럴 때 묵묵히 옆에서 함께 있어 주었고 따뜻하게 내 손을 잡아주었지만 자기 어머니의 며느리 학대를 근본적으로 막아주진 못했다. 부모에게, 특히 어머니에게 큰소리 한 번 내지 않고 말썽 한 번 피우지 않고 고분고분 말 잘 듣는 아들로 자란 터라 자기 아내를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근본적으로 지켜주진 못했다. 아들이 늦은 나이에 장가를 가면 그 어머니는 며느리 되는 여자에게 무조건 관대할 것이라고 믿고 한 치의 경계심도 품지 않았던 나의 우매함과 꾀없음을 탓할 뿐 이제 어머니의 악행과 나의 남편을 결부시켜 생각할 마음은 없다. 모든 게 다 세상을, 사람을 내가 믿고 싶은 대로 믿어버리는 어리석음 때문에 빚어진 일이다.

남편은 내게 어떤 사람인가?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성격이었던 내가 이제는 남편 없는 이 세상을 상상할 수 없다. 큰 집, 좋은 차, 사회적 지위를 격상시켜줄 황금 인맥을 줄 수는 없어도 퇴근길에 제철 과일과 빵 초콜릿 등을 사오면서 거의 매일 내게 줄 소소한 선물을 잊지 않는 이 남자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나? 이 남자의 마음을 외면할 수 있나? 때로 사는 게 버겁고 힘겨워도 내색 하나 없이 꿋꿋한 나무처럼 버티는 이 남자를 버리고 내가 살아갈 수 있나? 카페에서, 백화점에서, 식당에서, 시장에서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늘 촉촉한 사랑으로 빛났었다.

부부에게 이십 년의 시간은 단순한 수치로는 말할 수 없는 뭔가가 깊이있게 녹아든 공동의 시간이다. 늘 자유와 일상탈출을 꿈꾸어왔지만 이제 나는 남편이 없는 삶을 생각할 수 없다. 밤이면 한 침대에 누워 함께 단잠을 잔 세월이 이십 년이고 매일 출근과 퇴근을 반복하며 아침에 아쉽게 헤어져 저녁에 반갑게 만난 세월이 이십 년이고 날마다 쑥쑥 커가는 아이들 보면서 아이 엄마와 아빠로 함께 산 세월이 이십 년이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자유를 말하지 않고 일상탈출을 꿈꾸지 않는다. 남편이 없는 삶은 그저 불안한 과거로의 퇴행일 뿐이며 남편이 있어 내 삶은 비로소 완성된다. 제발 이 평화가 깨지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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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 부부라는 묘한 인연 21세기좀비 0 173790 18.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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