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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모 선언

卒母 선언

더 이상 침묵하고 싶지 않다. 엄마가 아닌 나를 되찾고 싶은 여성들의 단호한 외침.

나는 ‘희생’이라는 말이 늘 거북하다. 아니, 희생이라는 단어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거북하다는 것이 더 정확할 듯하다. 물론 어느 정도의 희생은 이타성이라는 미덕으로 감수한 적도 있다. 그러나 아무도 나서지 않으니 마지못해 하게 될 때에는, 아름다운 희생정신이라며 박수를 받는 게 영 찝찝했다.

희생이라는 단어에 일부러 금칠을 해놓은 것 같다고 할까. 특히 어머니라는 단어와 어울려 쓰일 때에는 희생이라는 단어 앞에 ‘무조건적인’이라는 수식어가 지박령처럼 붙어 있는 것만 같아서…. 이런 내가 ‘프로 불편러’인 것인지 신경이 쓰인다.

여기, 제목부터 자극적인 책이 있다. 바로 『엄마됨을 후회함』(오나 도나스 지음, 반니). 아무리 요즘 페미니즘이 ‘유행’이라지만 ‘엄마가 된 것을 후회한다’니 인륜을 저버렸다는 비판을 면치 못할 것만 같다. 옛날 같았으면 ‘칠거지악(七去之惡)’이라며 집 밖으로 쫓겨나고, 사회적으로는 분서갱유(焚書坑儒)를 당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다시, 이 책의 제목을 읽고 느낀 감정을 되짚어 보자. 왜 우리는 이 제목이 파격적이라고 느낄까. 먼저 인정해야 할 것은 ‘엄마 됨을 후회하는 여성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아주 평범한 엄마들이.

책 속의 여성들은 정신병자 취급을 받을까 봐 후회의 말들을 참아왔다. 정신병자의 기준은 어느 땐 다소 가혹해서, 사회가 추구하는 긍정적 가치에 위배되는 이들을 치료가 필요한 정신병자라 몰아세우는 일도 있다. 마치 구성원들의 인격을 소독해서 위생적으로 유지하려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저자 오나 도나스가 인터뷰한 대부분의 여성은 평범하게 결혼해서 자랑스러운 아이들을 키워낸 엄마들이다. 그녀들이 후회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평범하게 관습에 따라 흘러간 그녀들의 인생이 결코 능동적인 선택이 아니었다는 것.

여성에게는 시간에 따라 정해진 인생의 단계가 있으며, 그 최종 목적지는 ‘어머니’이고 그래야만 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녀들의 후회는 출산에 이르기까지 자신들의 선택이 능동적이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과, 엄마로서의 역할 때문에 개인으로서의 삶이 사라진 데서 비롯된다.

명확히 구분해야 할 것이 있다. 엄마 됨을 후회한다는 것이 곧 아이를 낳은 것을 후회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아이는 사랑하지만, 엄마로서 아이를 양육해야 한다는 책임과 역할은 사회에 의해 만들어진 면이 있기 때문이다.

사회는 ‘모성애’라는 단어에 ‘숭고한’이란 수식어를 달아 엄마에게 수많은 역할을 부여했고, 그 단어에 성스러운 금칠을 해놓았다. 여성에게 내재된 본능이라며 전복의 가능성을 제거하고, 예쁘게 치장한 빨간 카네이션을 달아주었다.

그래서 엄마로서의 역할보다 개인의 욕구가 불쑥불쑥 고개를 들 때마다 바람직한 어머니상과 개인적 감정이 충돌한다는 데에서 자책감을 느낀다. 후회의 말은 절대로 내뱉을 수 없다.

엄마들이 이렇게 후회의 마음을 꾹꾹 눌러가며 고통받고 있을 때, 남편들은 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남편이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바야시 미키 지음, 북폴리오)는 엄마가 되었다는 후회가 분노로까지 변한 아내들의 사례를 모았다.

‘독박 육아’와 ‘경력 단절’의 고통을 감내하는 아내에게 “집에서 논다”는 말이나 해대고, 개인적 즐거움을 실컷 누린 뒤 늙어서는 아내의 보살핌을 기대하는 남편에게 살의를 느낄 정도로 분노가 극에 달한 아내들의 이야기다.

여성이 아이를 양육하면서도 경력이 단절되지 않게 해주는 사회적인 의식과 장치도 필요하지만, 그동안 유독 육아에 대해서는 방관자거나 보조자 역할에 그쳤던 남편들이 적극적으로 육아에 나서야 한다. 그럼에도 육아를 모성애가 내재된 엄마의 일이라며 계속 거부하는 남편들은 “남자들이여, 살아남고 싶다면 여성과 연대하라”는 살벌한 경고를 받을 것이다.

남성이 육아에 적극적이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여자에게는 ‘모성애’를 내세워 육아에 전적인 책임을 부여하면서 부성애에 대해서는 다른 태도를 갖는다. 부성애란 것도 아빠에게 본능적으로 내재되어 있는데 말이다. 불공평하고 불합리한 처사다.

‘남편에게 아이를 맡기면 안 되는 이유’라는 제목의 게시물을 예로 들어보자. 자녀들과 놀아준다며 아이를 던지거나 돌리는 등, 위험한 행동을 하는 아빠들의 영상이나 사진을 본 대부분의 사람은 ‘철없는 남편의 귀여운 장난’으로 여기면서 유머로 받아들이고 웃는다.

만약 남편이 아니라 아내였다면 어땠을지 상상해보자. 열에 아홉은 ‘생각 없는 아줌마’라며 타박을 할 것이다. 같은 행동인데도 왜 아빠가 하면 장난이 되고, 엄마가 하면 생각 없는 짓이 되어버리는 걸까.

우리 사회는 어머니가 개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음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어디까지나 자애롭게, 자신을 희생하며 가족과 타인에 대한 헌신과 보살핌을 기대하는 이미지가 모성애의 정의로 고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엄마에게도 개인의 시간이 필요하다.

일본의 만화가 사이바라 리에코는 일찌감치 ‘졸모(卒母)’를 선언했다. 마이니치신문에 연재하던 만화 ‘매일 엄마’를 종료하면서 “실제 엄마로서의 역할도 졸업하겠다”고 한 것이다. 고등학생 딸이 있지만 이제 아침에 깨워주지도, 도시락을 싸주지도 않는다고 한다.

혼자 힘으로 세상을 살아갈 힘을 일찌감치 키워주겠다는 생각에서다. 자기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된 그녀는 여유롭고 행복한 생활을 즐기고 있다. 졸모 선언은 엄마라는 역할의 무한성을 역으로 증명하는 셈이다.

우리나라의 부모와 자식은 서로 의존적이다. 엄마는 자식이 자신을 필요로 해주길 바라고, 자식은 엄마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유대감과 의존성은 구별되어야 한다. 자식을 성인이 되어서도 경제적·정신적으로 부모에게 의존하는 ‘캥거루 세대’로 만들지 않고, 엄마도 개인의 휴식 시간을 갖기 위해 서로의 관계를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

마음속으로만 다짐해서는 안 된다. 일상의 언어보다 훨씬 견고하고 단단한 선언이 필요하다. 선언이란 안으로는 나 자신에게 향하는 결심과 다짐이 들어 있고, 밖으로는 나의 의지를 침범당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의 표명이기 때문이다.

어머니들이 자식들을 위하는 마음에 어려운 일도 마다지 않고 참아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만, 알아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오랜 침묵 대신에 나의 선언문을 쓰며 가족과의 관계에 대해 마음을 다잡아보자. 내 아이와 가족을 사랑하지만, 엄마에게 주어진 역할들은 너무 힘든 일이었다고 과감하게 고백해보자.

그리고 선심 쓰듯, 혹은 조금 근엄한 목소리로 외치는 것이다. “이제 나는 남편에게도 공평하게 아름다운 희생의 기회를 줄 것이며, 그의 부성애에 아낌없이 박수를 보낼 준비가 되어 있노라”고.

우리 사회는 어머니가 개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음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어디까지나 자애롭게, 자신을 희생하며 가족과 타인에 대한 헌신과 보살핌을 기대하는 이미지가 모성애의 정의로 고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에디터_윤지영 | 사진_김재민
여성중앙 2017.0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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