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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엄마의 고백

나쁜 엄마의 고백

온몸이 타투에다 이혼한 싱글 맘.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만드는 아티스트. 앞으로 보나 뒤로 보나, 겉으로 보나 속으로 보나 그래, 나는 좀 나쁜 엄마다.

난 정말 유능한 요리사다. 딸 앞에서 뭐든 뚝딱 만들어 차려낸다. 치킨 수프, 마카롱, 생선초밥, 애플파이 등 못 하는 음식이 없다. 플라스틱 음식 모형과 고무찰흙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식재료(?)니까. 장난감 음식을 이 접시에서 저 접시로 옮기고 뭉친 찰흙의 모양새를 바꾸며 쉴 새 없이 ‘얼마나 대단한 요리인가’ 떠들다 보면 금세 산해진미가 완성된다.

딸이 말한다. “엄마, 요리 진짜 잘한다. 엘사랑 뽀로로도 너무 맛있대.” 요리가 제일 쉬웠어요. 나는 어깨춤을 추며 기뻐한다. “요리 못 해, 안 해. 난 대식가지 미식가 아니야. 대충 먹자.

”점 보는 아저씨는 내 사주를 해석하며 ‘거대한 위를 갖고 태어났다’고 몇 번씩 강조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난 ‘대충 먹자’ 소리를 입에 달고 산다. 요리에 취미도 관심도 없으니까. 맛집에 길게 줄지어 서 있는 사람들을 보면 웃으면서 지나친다. ‘모두 수고 많으십니다’ 하고.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다. “네가 밥 먹는 것을 보면 무섭다”며 친구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식탐이 많았다. 내 입맛에 맞는 요리를 해보려고 시도한 적도 있다. 몇 번 성공도 했다. 이혼하기 전에도(아, 이혼을 했다) 종종 요리하긴 했다. 보람은 없었다.

전남편은 밥 먹는 게 귀찮아서 배에 뚜껑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간편하게 열어서 툭 집어넣고 닫으면 식사 끝. 희한하게도 이혼하고 나서야 그 말에 수긍이 갔다. 식욕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시간이 사라졌기 때문에. 나는 밥 먹는 일이 귀찮아졌다.

이혼을 결정한 뒤 얼마간은 친정살이가 내 생애 최대 치욕이었다. 보수적이고 꽉 막힌 동네, 나같이 위태로운 영혼을 감당할 리가 없는 평화로운 가족 거주지. 젊음과 추억을 버리고 친정으로 복귀(?)하던 날은 돌이켜보건대 정말 처참했다.

꺽꺽 울다 지쳐 잠든 날들이 지나가고 슬슬 적응이 되기 시작되자, 나는 어느새 무궁화 세 개짜리 호텔에 머물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월세, 관리비 걱정 없는 무임승차. 게다가 진짜 공동 육아. 심적으로 불편해도 현실은 편리했다. 그간 나의 불온함을 과대평가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 부모님의 집은 나의 딸이 자라기에도 한결 쾌적하고 안전했다. “몸에 해로운 것만 먹는다. 순엉터리, 네가 살림을 아냐?” 꼼꼼한 엄마에게 비난받아 몇 차례 싸운 뒤로 요리는 전혀 하지 않는다. 설거지나 청소를 도우며 민폐 저울의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할 뿐이다.

그러니 내 입장에서는 이혼 전보다 훨씬 나은 상황임에 틀림없다. 전남편 대신 엄마와 싸워야 한다는 애로 사항, 사생활이 존재하지 않는 단체 합숙, 구박하는 사람 없어도 눈치가 보인다는 점(양심?)을 제외하면 썩 행복한 상황이다.

그러나 식욕만은 예전 같지 않다. 전남편이 위자료 대신 내게 남기고 간 유산이라도 되는 듯 나는 자주 끼니를 거른다. ‘그러게. 배에 뚜껑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열고 넣고 닫고 배부르게.’ 한때 사랑했던 사람이 했던 말을 중얼거린다.“오늘은 도저히 일찍 일어날 수가 없어.

우리 00이 유치원 등원 좀 시켜줘. ”부모님에게 아이 등원을 부탁한 뒤 누워 있으면 자책감이 몰려온다. 혼자 ‘일어나, 일어나’ 노래를 부르지만 실천이 안 된다. 딸이 어린이집에 가 있는 동안 해야 할 일들을 떠올리며 ‘너희들 중 하나만 선택하라니 너무해’ 하고 원망한다.

늦게 일어난 날은 아침도 점심도 거른다. 힘센 욕망들이 내 안에 바글바글하니 무엇 하나는 버려야 하지 않는가. 늘 식욕이 뒤로 밀려난다. 나는 내가 원하는 것들을 두려워하기보다 가능한 한 실천하기로 했다. 더 많은 시간이 주어진다면.

언제나 문제는 시간, 아마도 시간. 이혼을 계기로 나는 ‘결단’이 무엇인지 겨우 알게 되었다. 고통과 한 이불 덮고 자는 법도 배웠다. 사람들 말처럼 시간은 치유력이 대단했다. 그러나 넘어졌다 일어나느라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고, 결과적으로 조바심이 생겼다.

프리랜서 무명작가라 해도 작가는 작가. 찾아주는 곳은 없어도 하고 싶은 것이 많다 보니 욕심이 거대하게 자란다. 음악도 그림도 글도 더 많이 창작하고 잘하고 싶어서 속으로만 끙끙 앓고 있다. ‘부족한 엄마’라는 말을 변명으로 쓰지 않고 연료로 쓰려면 내 안의 작은 칼을 갈고닦아 더 부지런해져야 한다.

“솜사탕만 먹는 언니가 괴물을 만났는데 같이 놀다가 각자 집에 갔대요. 끝!”같은 이야기를 무한 반복해달라는 딸의 요구를 들어주다 나도 모르게 발끈하고 말았다. 얼른 자야 신나는 내일이 온다고 딸의 하루를 서둘러 종료시켰다.

아이를 재워놓고는 막상 피곤해져 휴대폰만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딸에게 미안했다. 엄마가 해준 허구의 요리도 너무 맛있다고 칭찬하는 아이에게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나 죄책감이 들었다.

‘예쁜 때는 금세 지나간다.’ 아이 키워본 사람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아 하는 말. 나는 35개월 딸의 ‘유춘기’가 빨리 지나가기만 바랄 뿐 사랑스러운 모습을 새겨둘 생각은 하지 못했다. 앳된 얼굴, 어색한 말투, 귀여운 몸짓, 천천히 음미해야 할 순간들.

효율을 위해 불필요한 욕망은 접어두기로 결정했지만, 설마 나도 모르게 아이와 함께 보내는 시간의 기쁨까지 억누른 것은 아닐까. 딸은 이미 한참 전에 내 정체성의 일부가 되었는데, 그걸 부인하고 싶은 마음이 어딘가 남아 있던 걸까.

늘 솔직한 엄마, 용기 있는 엄마가 되어 아이의 든든한 아군이 되고 싶지만 조급한 상태로는 그런 엄마가 될 수 있을 리가 없다. 여자에겐 일보다 모성이 우선이란 말에는 격분한다. 하지만 일을 포기할 수 없다는 고집스러운 마음만큼, 내가 지구에 데려온 아이에게 다정한 삶의 안내자로 존재하고 싶은 소망도 강렬하다.

“할머니한테는 비밀이다. 알겠어? 입 좀 닦아. 초콜릿 묻었어.”딸의 작은 입에 달콤함을 넣어주며 속삭였다. “많이 먹으면 안 좋아. 가끔 먹는 거야.” 초콜릿 경고문을 읊어주며 입단속을 시키고 몸에 단맛이 퍼져 나가는 걸 느낀다. 엄마 방에서 놀고 싶다는 아이와 침대에 누워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옷들과 함께 뒹굴었다.

내 방식대로 딸과 우정을 쌓는다. 시간 결핍증을 앓고 있다는 사실도 잊어버렸다. “엄마가 매일 끝내주는 요리를 해줄게. 무지개도 볶아줄게.” 매끄러운 아이 볼에 내 뺨을 마구 비볐다. 나와 전남편의 인연으로 시작되었지만 당당하게 제 갈 길을 열어갈 나의 작은 사람. “초콜릿 딱 하나만 더?” 조용히 바스락거리며 군것질을 하는 동안 나는 나쁜 엄마임을 자책한다.

그런데 좋은 엄마는 뭘까, 또 스스로에게 묻는다. “엄마가 뭐 하는 사람인지 알아?” “그림 그리는 사람?”“아니야, 엄마는 뭐든지 하는 사람이야. 대부분 실패하는데, 그냥 해. 재미있어서. 엄마는 엄마가, 엄마 마음에 들면 좋겠어. 너는 나중에 어떤 일을 하고 싶어?” “나는 어른 되면 엄마랑 결혼할 거야.”‘그 대사 신선한데.’ 딸의 말에 멍하게 눈을 감았다.

전남편 대신 엄마와 싸우는 내가 다 자란 딸과 결혼하여 한집에 사는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불량한 욕망 덩어리들이 오손도손 부대끼며 사는 그림이 떠올랐다. ‘엄마는 결혼이란 제도를 더 이상 신뢰하지 않는단다.’ 시니컬한 마음을 꿀꺽 삼키고 나는 딸의 청혼을 기쁘게 승낙했다.

이상한 나라의 토끼, 미친 모자 장수, 여왕까지 합쳐놓은 듯한 이 ‘불량 엄마’는 확실히 그 나라가 어울리는 사람이지만, 너랑 있을 때는 꼭 너의 시간과 장소에 나를 맞출게. 결혼이 뭔지도 잘 모르는 어린 딸, 나의 앨리스. 아이의 끈끈한 손을 잡으니 나는 반쪽이 아닌 온 쪽이 된 것 같았다. 서둘러야 해, 종종거리는 엄마의 세계가 무엇인지 천천히 꼭 보여주고 말리라 다짐했다.

* 정새난슬은 가수 정태춘·박은옥의 딸로 태어나 런던 첼시 칼리지에서 조각을 전공했다.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다 2015년 디지털 EP ‘클랩함 정션으로 가는 길’을 발표했고, 2016년에 에세이집 『다 큰 여자』를 출간했다.

기획_성영주 | 글_정새난슬(뮤지션, 칼럼니스트) | 일러스트_남향진
여성중앙 2017.0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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