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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계절은

In between #7

단 한 번의 여름을 좋아한 적 없었는데, 그 해 여름은 달랐다

여름이 젊음, 일탈, 모험 같은 단어와 동의어처럼 쓰일 때마다 어쩐지 외로워지는 것 같았다. 세상 모든 여름이 그렇다는데, 내가 겪은 모든 여름은 침착하기만 했다. 바다는 좀 귀찮은 배경이었다. 짜고, 붐비고, 모래는 버석거리는데 바람은 끈적이기까지 해서. 여름 바다에서 놀았던 몇 개의 밤을 갖고는 있었지만 마냥 신이 난 적은 없었다. 여럿이서 친구의 팔과 다리를 잡고 바다 속으로 슬쩍 던져 넣는 장난도, 모래사장에서 할 수 있는 살가운 놀이에도 시큰둥했다. 어디 가서 책이나 읽었으면, 혼자 그렇게 생각하면서 멋쩍어 했다. 하지만 들키지 않으려고, 다 같이 있을 땐 진심으로 크게 웃었다.

봄엔 대체로 어쩔 줄 몰랐다. 겨우내 바짝 얼어 있었던 마음이 녹기 시작할 땐 무방비 상태가 되는 것 같았다. 그 틈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새 감정들이 매년 너무 많았다. 기온이 올라가면 사람들의 표정부터 연해지기 시작했다. 얇은 옷을 입고 ‘까르르’ 웃으면서 걸어가는 사람들이 귀여워보이기 시작하면 그날이 다 봄이었다. 보기에 좋으니 들뜨기도 같이 했다. 아무 일도 없는데 마음이 먼저 붕붕거릴 땐 혼자서 머쓱했다. 봄이라고 다 사랑에 빠지는 건 아니지만, 그럴 것 같은 마음만으로도 이렇게 두근거리니까 또한 봄이라고, 혼자 걸으면서 물색없이 좋아하는 계절이었다.

가을은 일기처럼 시작하는 계절이었다. 오랜만에 비가 내린 다음 날 아침엔 “오늘이 가을의 첫 날 같았다”라고 어디든 썼다. 기온이 영상 20도 아래로 내려간 날, “오늘부터 가을인가봐!” 누군가에게 보내는 문자는 그 자체로 구애 같았다. ‘추워진대요, 그러니 우리 올해는 같이 보낼 수 있을까요? 거절하지 마세요, 스산한 계절이니까. 계절이 바뀔 때마다 당신이 생각나요.’ 느낌표까지 명랑하게 찍은 문자 뒤엔 이런 마음이 숨어있었다. 그런 채 낙엽처럼 구르면서 즐기는 계절이었다.

좋기로는 겨울이 최고였다. 겨울만이 우아하게 ‘혼자’를 허락하는 것 같았다. 양 손은 더플 코트에 찔러 넣고, 이어폰을 끼고 비니를 쓰면 붐비는 어느 곳에서도 혼자일 수 있었다. 스키 타는 걸 그렇게 좋아하면서도 누구한테 권한 적은 없었다. 혼자 가서, 제일 한적한 꼭대기 코스에서, 지쳐서 비탈에 누울 때까지 타고 돌아오는 일정만을 즐겼다. 귀여운 사람만 보이면 “어디서 오셨어요? 혼자 오셨어요?” 묻는 질문들은 거기서도 경박하고 부질없어 보였다. 아니, 저런 식으로 누굴 만나기도 하는 거야? 그렇게 쉬운 거야? 그렇게 쉬운 사랑을 왜 하려는 거야?

밤에도 열이 다 식지 않았던 그 해 여름엔 한남대교를 몇 번이나 걸어서 건넜다. 티셔츠가 땀으로 젖어가는 걸 느끼면서, 다리 한 가운데 만들어 놓은 전망대에선 사진을 찍었다. 자동차 안에서나 스쿠터 위에선 볼 수 없었던 스케일의 서울이 다리 위에 있었다. 압구정 둔치 쪽에는 자전거를 타거나 빠르게 걷는 사람들이 강처럼 흐르고 있었다. 나누고 싶어서, 사진을 찍어 보내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한강은 검고 조명은 단정했다. 어떤 순간의 바람은 썩 시원하기도 했다.

“산책 나갔어요? 같이 걸으면 좋겠다.”

마침내 메시지를 받았을 때 나는 어떤 표정으로 웃고 있었을까? 마음은 그대로 약속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가벼운 약속은 기약이 없어도 좋았다. 산책은 언제든 할 수 있는 거니까, 같이 걷기를 원하는 마음은 사뿐하기만 했다. 여름을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의 문자였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많이 걷고, 기온이 떨어지면 덜컥 섭섭함이 앞선다고 말하는 사람. 폭염이 이어지던 한낮의 서울에서도 “너무 뜨겁지만 그래도 여름이 좋아요” 말하면서 ‘헤헷’ 웃었던 사람. 같이 보냈던 몇 번의 낮 동안은 계절이 우리 것 같았다.

“어머, 얘 표정 좀 봐, 그런 표정으로 누구랑 문자를 하는 거야?”

세상엔 도저히 감출 수 없는 감정도 있는 법이니까, 누군가와 함께였던 술자리에서 메시지를 주고 받을 땐 이런 질문을 받기도 했다. “너, 뭔가 시작된 것 같은데?” 짓궂게 예측하는 친구한텐 “그런 거 아니야” 웃으면서 말했다. 하지만 어떤 관계는 아무렇지도 않게 취향을 건드리고 지나갔다. 한 번도 좋아한 적 없는 계절의 장점을 발견하게 하고, 싫은 것 투성이였던 여름이라도 아쉬워하게 만들었다. 동네 슈퍼에 진열돼 있는 제철 과일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돌아가는 길이에요. 혹시 통화 가능해요?”

“그럼요! 책 읽고 있었어요.”

한남대교 위를 북쪽으로 걸으면서 들었던 목소리에는 나른하게 잠이 묻어있었다. 그렇게 목소리를 듣고 같이 산책하길 원하는 시간 만으로도 충만해지는 계절이 새로웠다. 이 태풍이 지나가면 곧 가을일까? 점점 짧아지는 가을이 지나가면 나는 또 강원도 산 꼭대기 어디에 혼자 서 있을까? 아무래도 좋았고, 중요한 건 오로지 그때였다. 처음으로 예뻐 보인 여름의 복판. 남은 여름이 한창이었다.

에디터 김은정

정우성

사진 영화 <매직 인 더 문라이트> 스틸 컷

디자인 전근영

In between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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